인간은 늘 죽음과 함께합니다.
비합리적이라고 할지라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평소에 왜 우리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성장'이라는 변화를 거듭하며 죽음의 그림자를 일상에서 지워 버리게 되죠. 자신만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근거 없는 맹신이 우리의 뇌를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과 직접 마주했을 때 인간은 그 무게에 짓눌려서 무한한 공포와 좌절, 그리고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마 그것은 직접 마주해보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재단서는 안 되는 억겁의 지옥이겠죠. <고교교사 2003>는 바로 이러한 억겁의 지옥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한 남자의 필사적인 몸부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용서받지 못할 슬픈 실험과 관찰
"당신을 사랑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자" 와 같은 달콤한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신 두려움에 두 손을 벌벌 떨며 수학문제 풀이에 열중하는 한 남자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 인공 코가 이쿠미(후지키 나오히토)는 풍선 같은 사람입니다. 툭 하고 건드리면 그대로 빵 터져버릴 것 같은 나약한 인간이죠. 사형선고(뇌종양)를 받고 시시각각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죽음과 용감하게 맞서보았으나, 그는 이미 그로기 상태입니다. 그의 정신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피폐해져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마치다 히나(우에토 아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경면화 효과'를 통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악질적인 실험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드는 감정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안타까움과 동정입니다. 인간이 죽음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외롭고 두려운 길입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길이기에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죽음의 순간을 경험하고 되돌아와 그 경험을 들려줄 수 없는 미지의 길이기에 우린 더 두렵고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공포와 외로움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감정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를 관찰함으로서 대리적 위로감과 안정감을 누리고자 하는 그를 이해해주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는 분노입니다. 그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도피적이었으며 치졸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히나의 순수한 사랑은 지나치게 과분한 신의 은총일 뿐이었습니다. 작품을 보는 내내 제 가슴 속에서 이 두가지 감정은 격렬한 파고를 일으키며 부딪히고 뒤엉켰습니다.
코가 이쿠미는 제가 본 캐릭터중 가장 복잡다난한 캐릭터입니다.
다 른 사람을 배려하는 착한 인간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이기적인 인간으로, 그리고 애인을 스스로 떠나보내고 혼자가 될 정도로 강한 인간에서 히나에게 무릎 꿇고 집착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이 그 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후지키 나오히토라는 배우가 아주 잘 소화해 줬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장면 중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거울을 보면서 홀로 '불쌍하네' 라며 씨익 웃는 장면이었습니다. 어찌나 무섭던지... 인간 본연에 숨겨진 마성이 폭발하는 느낌이랄까요. 최근에 계속 그의 작품을 보면서 느끼지만 참 매력있는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2. 우주의 먼지가 되어서도 다시 만날 아름다운 사랑
코가의 이러한 이기적인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켜준 존재가 히나였습니다.
그 녀는 이쿠미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훨씬 어른스럽고 의연했습니다. 또한 현명하게 죽음에 대처할 줄 아는 조숙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코가가 보여준 도피적 사랑이 아니라 주체적인 사랑을 통해서 두려움을 극복해나갑니다(여 의사는 그것을 '의존'이라는 단어로 부정하지만 나중에 그것은 주체적인 사랑이었음이 드러나죠).
이 극에서 히나가 내뿜는 빛은 너무나도 강렬합니다. 외모적으로 엄청 예쁘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극 전체를 밝게 빛내준 그녀의 존재감은 엄청납니다. 과연 <히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이 칙칙한 드라마을 끝까지 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그녀는 이 작품의 유일한 빛이요, 희망이요, 구원이었습니다.
"계산해줘, 아무리 작아져도 잊지 않을꺼니까. 먼지가 되어서도 우주의 어디선가 선생님이랑 만나고 싶어. 그러니까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지 알고 싶어. 깜깜할꺼야. 하지만 어느 정도라고 말해주면 안심하고 기다릴 수 있어"
제 가 가장 인상 깊고 슬프게 들은 대사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눈물이날 꺼 같았습니다. 너무 구구절절하고 예뻐서요. 광기어린 수학문제 풀이가, 사랑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변하는 숭고한 순간이며, 이는 이쿠미가 히나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됩니다.
우에토 아야는 캐릭터를 참 잘 이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칫 잘못하면 어린애같이 애교스러운 모습으로만 비춰질 수 있는 캐릭터를 슬픈 귀여움, 코가를 감싸안는 성숙한 사랑이라는 느낌으로 비춰지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캐릭터를 잘 이해한 그녀의 조숙한 연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유성>에서 그녀의 예상외의 연기력에 놀랐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놀랄 일이 아니더군요. 당시 18세의 그녀는 이미 한 극을 이끌어나갈 만한 주연급 연기자로서 손색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집착과 광기로 점철된 이기적인 사랑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다소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상한건지 드라마가 이상한건지 구분이 안되는 혼돈상태에 이르게 되죠. 제 관점에서 그들은 전부 정신이 살짝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 기로 똘똘 뭉친 호스트 카미야 유지(나리미야 히로키), 그가 만든 게임에서 제멋대로 놀아나는 에자와 마미(아오이 유이), 죽은 옛 연인을 잊기위해 학생들을 수없이 강간하고 그 비디오 테이프를 간직하고 있는 후지무라(쿄모토 마사키), 후지무라 선생에게 엄청난 집착을 보이는 영어선생 테지마 에미(마사베 카오리), 그리고 자신의 환자와 남편도 구별 못하는 여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저는 이 작품 제목이 왜 '고교교사' 인지 모르겠습니다)
여튼 위에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관통하는 감정은 '두려움과 '집착'입니다. 사실 저는 이들의 사랑이 과연 집착인지, 혹은 속죄인지, 혹은 진짜 사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듣고 '아 이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다소간의 동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조연들 중 나리미야 히로키는 꽤 인상이 깊었던것 같습니다. 블러디먼데이의 히어로 <J>는 이 때의 연기가 시초가 되어서 탄생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다소 오버스러운 경향이 없지않아 있지만, 악역이 꽤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4. 음울함 속에 숨겨진 영원의 사랑과 죽음
고교교사는 노지마 신지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알 고 있습니다.
그 의 작품은 어둡고 우중충한 작품들이 많죠. 특히 그의 작품들 속에는 인간본연의 어둡고 악한 모습이 담겨있는 것 같아 보고나면 무척 씁쓸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고교교사도 그렇습니다. 고교를 배경으로 그린 작품이지만 상당히 하드코어적인 표현법이 많이 등장합니다. 섹스, 강간 등이 아무런 여과 없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지고, 인간본성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이 주를 이룹니다(드라마치고는 꽤 야하고 자극적입니다). 우울하고 우중충한 이야기를 싫어하시는 분에게는 가급적 추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러나 이 작품 속에서도 어둠 속에 숨겨진 독특한 사랑이야기가 존재합니다. 우울하지만 그 어둠이 너무 칙칙해서 오히려 그 어둠에서 비춰오는 단 한줄기의 빛이 더 간절해지고, 더 애절해집니다. 사람은 영원을 사는 생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영원한 사랑이란 다소 허망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영원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그려냈습니다. 두 사람이 우주의 먼지가 되어서 다시 만날 그 시간을 이쿠미가 계산해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추억 속에 각인되어 살아가는 것을 초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고교교사는 어떤 작품이예요" 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전체적인 음울함 속에도 영원의 사랑 이야기를 공감되고 애절하고 표현해낸 작품이라고 말입니다.
문득 죽어가는 이쿠미를 바라보면서도 마지막까지 맑게 웃는 히나의 슬픈 미소가 떠오릅니다. 언젠가 몇 억년 후에 이쿠미와 히나가 우주의 먼지가 되어서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긴 글 마무리 지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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